우암 송시열 업적 및 사약 사건 조선 후기 우의정을 지낸 우암 송시열은 정치가이자 성리학자이며 철학자였습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충북 이원 구룡촌에서 송갑조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송갑조가 집을 떠나 어느 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공자가 그를 불러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을 보내니 잘 가르치라"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공자가 사라지고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부인이 아들을 출산했고 이 아들이 바로 송시열이라고 합니다. 송시열은 세살 때 글자를 깨우치고 7세 때 형들이 읽는 글을 모두 받아 썼다고 합니다. 이러한 능력이 훗날 주자학을 완성한 대학자다운 출발이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성현의 학문을 닦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삼았으며, 1633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 역사지식 2016. 10. 15. 숙종 20년 갑술환국 배경 및 과정 1694년(숙종 20년)에 일어난 갑술환국은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이 쫓겨나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은 일을 말합니다. 갑술환국은 남인의 편에 선 왕비 장씨(장희빈)의 행동과 성정이 거칠고 포악해 싫증을 느낀 숙종이 서인들의 편을 들어준 사건인데요,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았던 남인들이 쫓겨나고 서인들(노론과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사환국이란 1689년(숙종 15년)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합니다. 1694년 노론의 김춘택과 소론의 한중혁 등이 폐비가 되어 쫓겨난 인현 왕후의 복위를 위한 운동을 벌이자 민암 등의 남인들은 서인 일파(노론과 소론)를 제거하기 위해 속종 에게.. 역사지식 2016. 10. 14. 연산군 장녹수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 후궁 장녹수는 태어난 연도는 미상이며,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1506년(중종 1년)에 참형되었습니다. 연산군 장녹수는 모두 악명이 높기로 유명 한데요, 장녹수는 아버지가 양반이었으나, 어머니는 첩이었기 때문에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장녹수는 용모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 솜씨도 뛰어났으며, 제안대군 집에 있는 종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는데, 연산군이 제안대군 집을 방문했다가 장녹수에게 반하여 궁궐로 데려와 숙원(종4품) 품계를 내리고 총애하였습니다. 장녹수에게 빠진 연산군은 더욱 더 사치와 향락에 눈을 돌렸고, 경치가 좋은 곳곳에 금표라는 푯말을 세워놓고 일반 백성은 일씬도 하지 못하게 하며 놀이를 즐겼습니다. 연산군과 장녹수는 백성들의 원망은 아.. 역사지식 2016. 9. 1. 맹사성이야기 (맹사성의 일화) 조선시대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줍니다. 맹사성 (1360~1438) 은 청렴결백한 조선 초기 정치가로 고려 공민왕 때 충청도 온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났습니다. 그는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어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기까지 했습니다. 맹사성은 27세(1386년, 고려 우왕 12)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이조참의.예문관제학 등 중요 직책을 역임했고, 48세(1407년)에 명나라에 다녀 온 뒤 한성부윤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1415년(태종 15년) 다시 벼슬길 에 들어서 예조.호조.공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1427년(세종 9)에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맹사성은 좌의정이.. 역사지식 2016. 8. 29. 걸프전쟁 원인 결과 요약 정리 1991년 1월 17일 새벽 0시 50분을 기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걸프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걸프전쟁 원인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공군 전폭기(F15E)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면서 걸프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첨단과학기술과 전자 장비가 동원된 걸프전쟁은 미국이 전자오락게임을 펼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십자(十)자 표시에 맞추어 투하된 폭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상의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현대전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닭았습니다. 중무장한 육군이 총을 들고 쳐들어가서 적의 지역을 점령하는 전쟁은 원시 시대의 수법처럼 여겨졌 습니다. 미국 전폭기는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위치한 미국 공군 기지에서 발사되어 나갔.. 역사지식 2016. 4. 23. 알렉산더 대왕 동방원정 요약 설명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더 대왕(BC 356~BC 323) 동방원정은 지중해와 오리엔트 세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는 혼란에 빠져 있던 그리스를 정복하고 페르시아까지 정벌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알렉산드로스라는 젊은 왕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매우 영리한 왕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해, 태살리아에서 사들인 말이 너무 사나워서 타는 장수가 없었기에, 필리포스왕이 말의 목을 베어 버리라고 명령하자 알렉산드로스 왕자가 나서서 타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왕자는 사나운 말의 목을 쓰다듬다가 날쌔게 올라타고 몰았습니다. 주위에 환성이 터지자 왕이 왕자를 불러서 물어 보았.. 역사지식 2016. 4. 13. 노예무역 배경 흑인노예 실상(삶) 산업화로 인한 노동력 확보의 필요성이 흑인 노예무역 배경이며, 이로 인한 흑인노예 실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습니다. 유럽인들은 흑인 노예무역이 한창 성행할 때 "흑인 노예는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기계 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계나 상품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인간은 크고 작은 전쟁을 하였을 때 승리자는 패배자 중 쓸 만한 남녀를 끌고 가서 일을 부려먹었으며, 이것 을 전쟁노예라고 하는데, 유럽인들은 노예를 사고 팔았으며, 최하위계층이었던 노예들은 그 시대 노동력의 근본이었고, 이런 '전쟁노예'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으나, 흑인노예가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6세기 중반경입니다. 흑인 노예무역은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까지 약 400면 동안 행해졌는데, .. 역사지식 2016. 2. 15.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및 당백전 상식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재건을 위해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재건 목적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로 인해 조선 정부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결국 당백전을 발행하여 화폐 유통 질서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타 버린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을 왕으로 앉힌 뒤 정권을 움켜진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존엄성을 내세우기 위해 대신들의 반대와 열악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1865년부터 경복궁 중건에 나섰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능이나 개인의 사유지에서도 목재를 베어 오며, 백성과 종친들 에게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고종 5년인 1868년에 .. 역사지식 2016. 2. 11. 을사조약 을사늑약 바로알기 대한제국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하게 된 '을사조약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되었습니다.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은 동일한 조약인데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라고 해서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을사늑약이란 강압에 억눌려서 억지로 한 조약이라는 뜻입니다. 을사조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며, 을사년에 체결되어 을사 보호 조약이라고 불립니다. 대한 제국 은 이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일제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궁 안으로 끌고가 강압적으로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였 습니다.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부대신 이하영만이 강압적인 을사조약에 반대하였 습니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 역사지식 2016. 2. 1. 일본 태평양 전쟁 어떻게 패망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이 일으킨 '일본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현지 날짜 7일에 미국 진주만을 기습 폭격함으로서 일어났습니다. 순식간에 미국인 4,000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영국의 거대한 전함 도 다른 해상에서 일본 전투기에 의해 격침당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은 확대되어 갔습니다. 일본군은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자바를 짓밟았으며, 버마를 점령했습니다. 계속해서 기세를 떨치던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패배했으며, 이후 연합군의 반격으로 일본군 진지 는 잇달아 무너졌습니다.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은 후퇴했고, 사이판 요새도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천황 폐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고 각 전선에서 자결하는 일본군이 늘어났습니다. 일본군의 발악이 극도 에 달했을 무렵,.. 역사지식 2016. 1. 13. 한명회 신숙주 숙주나물 유래 세조를 임금으로 만든 사람 중에 한명회 신숙주 어떤 인물인지 또 숙주나물 유래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권람과 함께 수양대군(세조)을 왕위에 올리고자 1453년 김종서를 죽이는 계유정난을 성공하면서 나란히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 단종 임금을 몰아내고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이 되는데 가장 앞장 선 인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어떤 인물들인지 아래와 같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수양대군(세조)의 책사 한명회(1415~1487)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그에 관한 모든 일을 계획하고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 온 한상질의 손자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불.. 역사지식 2015. 12. 29. 독일통일과정 요약 정리 1990년 10월 3일 분단되었던 독일이 통일되었는데, 독일통일과정은 서독의 경제력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이른바 2+4회담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1990년 8월 2+4회담에서 통일조약이 체결되고 9월에는 2+4회담의 승인을 얻어 10월 3일 마침내 민족이 통일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어서 독일이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우리와 비슷하여 독일의 통일은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면서 한반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요, 분단되었던 독일의 통일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인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이 크리미아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열었는데, 이것을 '얄타 회담'이라고 .. 역사지식 2015. 12. 21.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