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장녹수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 후궁 장녹수는 태어난 연도는 미상이며,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1506년(중종 1년)에 참형되었습니다. 연산군 장녹수는 모두 악명이 높기로 유명 한데요, 장녹수는 아버지가 양반이었으나, 어머니는 첩이었기 때문에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장녹수는 용모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 솜씨도 뛰어났으며, 제안대군 집에 있는 종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는데, 연산군이 제안대군 집을 방문했다가 장녹수에게 반하여 궁궐로 데려와 숙원(종4품) 품계를 내리고 총애하였습니다. 장녹수에게 빠진 연산군은 더욱 더 사치와 향락에 눈을 돌렸고, 경치가 좋은 곳곳에 금표라는 푯말을 세워놓고 일반 백성은 일씬도 하지 못하게 하며 놀이를 즐겼습니다. 연산군과 장녹수는 백성들의 원망은 아.. 역사지식 2016. 9. 1. 맹사성이야기 (맹사성의 일화) 조선시대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줍니다. 맹사성 (1360~1438) 은 청렴결백한 조선 초기 정치가로 고려 공민왕 때 충청도 온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났습니다. 그는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어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기까지 했습니다. 맹사성은 27세(1386년, 고려 우왕 12)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이조참의.예문관제학 등 중요 직책을 역임했고, 48세(1407년)에 명나라에 다녀 온 뒤 한성부윤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1415년(태종 15년) 다시 벼슬길 에 들어서 예조.호조.공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1427년(세종 9)에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맹사성은 좌의정이.. 역사지식 2016. 8. 29. 걸프전쟁 원인 결과 요약 정리 1991년 1월 17일 새벽 0시 50분을 기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걸프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걸프전쟁 원인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공군 전폭기(F15E)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면서 걸프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첨단과학기술과 전자 장비가 동원된 걸프전쟁은 미국이 전자오락게임을 펼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십자(十)자 표시에 맞추어 투하된 폭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상의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현대전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닭았습니다. 중무장한 육군이 총을 들고 쳐들어가서 적의 지역을 점령하는 전쟁은 원시 시대의 수법처럼 여겨졌 습니다. 미국 전폭기는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위치한 미국 공군 기지에서 발사되어 나갔.. 역사지식 2016. 4. 23. 알렉산더 대왕 동방원정 요약 설명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더 대왕(BC 356~BC 323) 동방원정은 지중해와 오리엔트 세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는 혼란에 빠져 있던 그리스를 정복하고 페르시아까지 정벌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알렉산드로스라는 젊은 왕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매우 영리한 왕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해, 태살리아에서 사들인 말이 너무 사나워서 타는 장수가 없었기에, 필리포스왕이 말의 목을 베어 버리라고 명령하자 알렉산드로스 왕자가 나서서 타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왕자는 사나운 말의 목을 쓰다듬다가 날쌔게 올라타고 몰았습니다. 주위에 환성이 터지자 왕이 왕자를 불러서 물어 보았.. 역사지식 2016. 4. 13. 노예무역 배경 흑인노예 실상(삶) 산업화로 인한 노동력 확보의 필요성이 흑인 노예무역 배경이며, 이로 인한 흑인노예 실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습니다. 유럽인들은 흑인 노예무역이 한창 성행할 때 "흑인 노예는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기계 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계나 상품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인간은 크고 작은 전쟁을 하였을 때 승리자는 패배자 중 쓸 만한 남녀를 끌고 가서 일을 부려먹었으며, 이것 을 전쟁노예라고 하는데, 유럽인들은 노예를 사고 팔았으며, 최하위계층이었던 노예들은 그 시대 노동력의 근본이었고, 이런 '전쟁노예'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으나, 흑인노예가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6세기 중반경입니다. 흑인 노예무역은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까지 약 400면 동안 행해졌는데, .. 역사지식 2016. 2. 15.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및 당백전 상식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재건을 위해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재건 목적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로 인해 조선 정부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결국 당백전을 발행하여 화폐 유통 질서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타 버린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을 왕으로 앉힌 뒤 정권을 움켜진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존엄성을 내세우기 위해 대신들의 반대와 열악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1865년부터 경복궁 중건에 나섰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능이나 개인의 사유지에서도 목재를 베어 오며, 백성과 종친들 에게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고종 5년인 1868년에 .. 역사지식 2016. 2. 11. 을사조약 을사늑약 바로알기 대한제국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하게 된 '을사조약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되었습니다.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은 동일한 조약인데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라고 해서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을사늑약이란 강압에 억눌려서 억지로 한 조약이라는 뜻입니다. 을사조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며, 을사년에 체결되어 을사 보호 조약이라고 불립니다. 대한 제국 은 이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일제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궁 안으로 끌고가 강압적으로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였 습니다.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부대신 이하영만이 강압적인 을사조약에 반대하였 습니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 역사지식 2016. 2. 1.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