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연산군 장녹수

꼬두암 2016. 9. 1.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 후궁 장녹수는 태어난 연도는 미상이며,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1506년(중종 1년)에 참형되었습니다. 연산군 장녹수는 모두 악명이 높기로 유명

한데요, 장녹수는 아버지가 양반이었으나, 어머니는 첩이었기 때문에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장녹수는 용모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 솜씨도 뛰어났으며, 제안대군 집에 있는 종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는데, 연산군이 제안대군 집을 방문했다가 장녹수에게 반하여

궁궐로 데려와 숙원(종4품) 품계를 내리고 총애하였습니다. 

 

 

장녹수에게 빠진 연산군은 더욱 더 사치와 향락에 눈을 돌렸고, 경치가 좋은 곳곳에

금표라는 푯말을 세워놓고 일반 백성은 일씬도 하지 못하게 하며 놀이를 즐겼습니다.

연산군과 장녹수는 백성들의 원망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장녹수는 원하는 것 모두를 연산군에게 얻어 가질 수 있었으며, 그후 숙용(종3품)의

지위까지 올랐고 자신의 오빠와 자녀들을 모두 양인 신분으로 올려 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재물은 이자놀이를 할 정도로 쌓였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에게 향락을 부추키며 나라의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1506년 박원종과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 때 참형을 당했으며, 연산군은 강화도

서쪽의 작은 섬인 교동현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귀양지의 가시 울타리 오두막에 갇혀 지내던 연산군은 몇 달 뒤 병으로 죽었습니다.

연산군의 재위기간은 1494년 12월~ 1506년 9월(11년 9개월)입니다. 폭군으로 악명

높은 연산군은 결국 쫓겨나 병들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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