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을사조약 을사늑약 바로알기

꼬두암 2016. 2. 1.

대한제국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하게 된 '을사조약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되었습니다.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은 동일한 조약인데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라고 해서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을사늑약이란 강압에 억눌려서 억지로 한 조약이라는 뜻입니다.

 

을사조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며, 을사년에 체결되어 을사 보호 조약이라고 불립니다. 대한 제국

은 이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일제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궁 안으로 끌고가 강압적으로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였

습니다.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부대신 이하영만이 강압적인 을사조약에 반대하였

습니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일제에 협력하였는데, 일제의 앞잡이인 이들 매국노를 '을사 5적'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그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고종은 국민들의 자주 정신 요구에 의해 1897년 2월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습니다. 고종의 신변은 더욱 위험해지고 이 무렵 독립 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 공공회가

만들어져 '자유 민권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904년에는 러일 전쟁이 일어났는데, 일본은 러시아에게 이기고 나서 군사 압력으로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요

했으며, 이듬해인 1905년에는 일제 침략의 우두머리인 이토히로부미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약은 외교권 박탈 조약으로 우리나라 대한 제국이 망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주필인 장지연은 '시일야 방성 대곡(이 날 목놓아 우노라)'이라는 논설을

발표했습니다. 장지연은 이 논설에서 일제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을사 5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 우리나라를 남에게 팔아 백성을 노예로 만들려는 매국노임을 비난하며,을사조약

무효를 부르짖었습니다. 

 

 

전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고 조약 무효를 부르짖으며 매국노의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시종 무관 민영환

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자 순국한 지 8개월 뒤인 1906년 7월에 가지가

4개, 잎이 48개인 푸른 대나무가 민 충정공(민영환)의 피묻은 옷을 봉안해 둔 마루 틈새에서 솟아나서 그의

애국심을 나타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특진관 조병세도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채 자결하고, 이어 홍만식, 이상철도

목숨을 끊었습니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운 애국 지사들도 많았습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울분을 이기지 못한 이준은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이 헤이그 특사 사건(1907년 6월)으로 고종은 이 해 7월 20일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으

며, 순종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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