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줍니다. 맹사성 (1360~1438)
은 청렴결백한 조선 초기 정치가로 고려 공민왕 때 충청도 온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났습니다. 그는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어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기까지 했습니다.
맹사성은 27세(1386년, 고려 우왕 12)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이조참의.예문관제학 등 중요 직책을 역임했고, 48세(1407년)에 명나라에 다녀
온 뒤 한성부윤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1415년(태종 15년) 다시 벼슬길
에 들어서 예조.호조.공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1427년(세종 9)에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맹사성은 좌의정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을 맡았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책인
[팔도지리지]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했습니다. 집에는 비가 새 물동이를 방 가운데
들여 놓아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지방으로 시찰을 나갈 때나 고향을 오갈 때는
농부차림으로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하는데, 아래와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맹사성의 일화>
비가 오는 어느날 맹사성은 소를 타고 가다가 주막에 들어가서 한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심심하니 우리 장기나 한판 주지 않을공? 답은 끝에 '당'자로 운을 달게."
젊은이가 "좋도록 합시당."하여 두 사람은 장기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가시는 길인공?" "한성에 가는 길이당." "무엇하러 가는공?" "과거보러 간당."
"내가 잘 아는 시험관이 있는데 시험문제를 알아다 줄공?" 그러자 젊은이는 별안간
장기판을 뒤엎고는, "뭐 이런 늙은이가 있당." 하며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성으로 올라간 젊은이는 과거에 급제하여 마지막으로 면접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시험관 앞에 가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주막에서 함께 장기
두던 노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떨어뜨릴공?" "아이구, 살려 줍시당." "그 때 떠 보았으니 면접은 보나마나인공."
맹사성은 장기판을 뒤엎었을 때 이미 젊은이가 쓸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
습니다. 물론, 젊은이는 합격하여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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