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을미사변 일본이 조선의 국모를 무참히 죽인 사건 요약 설명

꼬두암 2017. 12. 26.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요, 일본은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을까요? 조선의

국모를 무참히 살해한 일본의 만행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기에

을미사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을미사변 - 일본이 조선의 국모를 무참히 죽인 사건>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에 무장한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공격하고 명성황후가 머물고 있는 옥호루로 달려가

궁녀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면서 마침내 명성황후를 찾아내어 무참하게

시해하고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우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1851~1895)는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럼 일본은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을까요?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손잡고

반일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려고 하자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을 멀리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이에

일본을 반대하고 멀리하려는 명성황후에게 앙심을 품고 마침내 해치게

된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까지 그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일본의 세력이 조선에서 커지는 것을 우려해

일본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결국 일본은 조선에서 물러났고, 조선은 러시아와 손잡고 친일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이때 명성황후가 핵심이 되어 러시아와 손잡고

반일정책을 추진했으므로, 일본은 미우라 공사에게 명성황후를 살해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는 '여우사냥'이라는 작전을 세워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을미사변'이라 부릅니다. 조선을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자신들을 멀리하면서

러시아와 가까이 지내는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같은 존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조선의 상황>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에 고종을 위협했

습니다. 친일파 김홍집을 내세워 '을미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내용은

태양력 사용과 종두법 실시, 우체국 설치, 단발령 등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개혁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반발이 거센 것은 단발령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본을 몰아내자고 '을미의병'을 일으켰으며,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일본과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고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

부릅니다.

 

이로 인해 '을미개혁'을 단행한 김홍집 내각은 물러났지만, 조선의

국격과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친러파가 정부를 구성해 조선내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습니다.

 

 

<참고사항>

명성황후(1851~1985)는 고종의 왕비로서 1873년에 고종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흥선 대원군을 탄핵으로 몰아내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했으며, 개화정책을 실시하고 문호를 개방하는 등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으며, 친러시아 정책을 펼치다가 을미사변으로 피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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