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정묘호란의 발생 원인

꼬두암 2020. 10. 13.

정묘호란이란 1627년 1월 13일(인조 5년)에 만주에 본거지를 둔 후금(훗날 청)이 침입하여

일어난 조선과 후금 간의 전쟁을 말하는데요, 정묘호란의 발생 원인은 무엇일까요?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정묘호란의 발생 원인>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의 중립정책 대신 서인들이 노골적으로 명나라와는 친하고 후금은

오랑캐 집단이라고 무시하는 친명배금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친명배금정책이란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후금(훗날 청)과의 관계를 멀리한 조선의 외교

정책을 말합니다.

 

정묘호란으로 인해 조선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으며, 3월 3일 맺은 정묘조약으로

후금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는 치욕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정묘호란의 결과>

후금이 조선의 의주, 용천, 선천, 안주, 평양, 황주, 평산을 점령하자,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란을 갔으며,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하였습니다.

 

그후 후금은 2월 9일에 조선 땅 황주에서 부장 유해를 강화도로 보내며 '명나라의

연호(천계)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양측은 ① 화약 후 후금은 즉시 철병할 것, ② 후금은 철병 후 압록강을 재침입하지

않을 것, ③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3월 3일 '정묘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왕자 대신에 조선 왕실의 종친인 원창군을 인질로 후금에 보냈으며, 후금의

군사는 조선에서 철수를 하였습니다.

 

 

<정묘호란 전개과정 상세설명>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펼치던 광해군이 폐위되고

친명파인 인조가 등극하자 이괄의 난(1624년)을 함께 한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쳐 인조반정과 광해군 폐위 사실을 알리며 후금을 자극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627년, 후금의 칸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후금의 2대

칸으로 등극하면서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자신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곱지않게

생각하여 조선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결국 1627년 1월 13일, 홍타이지는 광해군의 복수를 구실 삼아 만주의 부족장 아민에게

군사 3만명을 주면서 조선을 침입하라고 명하고, 아민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쳐들어

오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의주 부윤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은 용감히 싸웠지만 적이 너무 강하자 창고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으며, 후금의 군사는 계속 남으로 쳐내려와 곽산과 정주,

안주를 함락시켰다.

 

조선의 서북방에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부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모문룡이 있던 가도도

이미 짓밟혔고, 목숨을 간신히 건진 모문룡은 신미도로 도망쳤다.

 

후금의 군사들이 평양성을 무너뜨리고 황주까지 진격해와 한성을 눈앞에 두자,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다.

 

이후 국난을 극복하려는 인조는 이전에 후금에게 항복한 강홍립에게 화해를 청해

보려고 강홍립의 아들을 내세웠다.

 

 

강홍립은 후금 진영으로 찾아온 아들을 보자 깜짝 놀랐다. 후금에 있을 때 한윤이

찾아와 인조가 자신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강홍립은

가족이 모두 죽은 줄 알고 조선에 복수하려고 후금의 군사를 따라 온 것이다.

 

강홍립은 자신의 가족이 살아있자 곧 인조에게 화해를 주선하겠다는 글을 써 아들에게

주었다.

 

화해를 주장하는 최명길, 이귀 등과 강홍립의 주선으로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고,

후금의 군사도 물러갔다.

 

정묘호란으로 조선 조정은 화해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반대하는 척화파로 나눠졌으며,

대신들 모함으로 강홍립은 옥에 갇혔다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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