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효종 북벌 정책 물거품이 되어

꼬두암 2015. 12. 17.

조선의 제17대 임금 효종 북벌은 물거품으로 끝났습니다. 효종의 북벌정책은 청나라를 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어영청과 속오군을 강화하고 금군을 기병으로 바꿨으며, 어영군과 훈련도감의 군사를 늘

한성 외각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 치밀하게 북벌을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행에게 조총과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발하게 하며 북벌 준비에 박차를

으나, 김자점 등 친청파의 반대와 재정 부족으로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

정도로 더 강성해졌고, 효종마저 재위 10년 만에 승하함으로써 북벌 계획은 수포가 되었습니다.

 

 

이제 효종의 북벌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인조가 승하하자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제17대 임금인 효종이 되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

갑자기 죽자 세자에 책봉되었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8년 동안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던 그는 고통 속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별렀었다. 31세에

위에 오른 효종은 김자점을 파직시키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불렀다. "선왕마마의 삼전도의

치욕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오!" 효종은 북벌 계획을 은밀히 세우기 시작했다.

 

 

한데, 청나라 사신이 와서 뜻밖에 북벌 계획을 따지자, 효종은 사신을 금은보화를 주며 달래어 보냈다.

조정에서는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일러바친 김자점과 역관 이형장을 붙잡아 귀양 보냈다.

 

어느날 효종은 대신들의 조례를 받는 자리에서 북벌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했고, 어영대장 이완

은 군사를 모으고 훈련을 시켰다. 훈련원에는 네덜란드 사람 박연도 나와서 대포 사격술을 가르쳤다.

따라서 북벌에 대한 기대는 조정만이 아니라 온 나라에 퍼졌다.

 

 

이렇게 조선에서 군비를 늘리며 북벌의 꿈에 가득차 있을 때, 청나라에서 나선 정벌을 위해 조총으로

무장한 군사들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나선은 러시아를 가리킨다. 몽골족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는

1480년에 이반 3세에 의해 독립했다. 그의 손자 이반 4세는 영토를 늘렸으며 바야흐로 러시아 세력이

남하하여 우수리강의 입구까지 뻗쳤다.

 

 

러시아 세력은 1652년(효종 3년)에는 지방 원주민인 아찬족과 충돌했다. 아찬족은 러시아에 패하자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한데, 2,000여 명의 청나라 군사가 패하자 조선의 조총 부대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마침 북벌을 준비하고 있던 효종은 훈련 중인 군사들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마음에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파견하니 이를 '나선 정벌'이라 한다.

 

조선의 군사들은 막강한 화력으로 러시아 군대를 크게 이기며 군사력을 과시했고, 이에 효종은 더욱

북벌 계획에 자신감을 갖는다. 제1.2차 나선 정벌에서 조선의 조총 부대는 모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효종은 북벌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선 정벌로 자신감을 얻었고, 그 동안 군비를 증강해 온

터였기 때문이다. 한데, 효종은 1659년 5월 1일 목 뒤에 종기가 악화되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기우제를 지내느라 애를 쓰다가 병이 난 것이다. 5월 3일에 비가 내리는가 싶었으나 땅을 적시고는 

이내 그쳤다. 이튿날 저녁부터 효종의 상태는 위태로워졌고, 날이 새자 궁궐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토록 북벌을 염원하셨는데..." 이완은 효종의 주검 앞에서 통곡을 하였다. 효종이 불과 41세의

나이로 승하함으로써 북벌 계획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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