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의 만행 확인하기

꼬두암 2015. 12. 8.

일본 자경단이 아주 잔인하게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입니다. 간토대지진은 일본 간토 지방에 일어났던 큰 지진으로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분에 일어났습니다.

 

이 지진은 간토 지방에서 시작되어 순식간에 시즈오카와 야마나 시로 이어져, 도시가 불바다가 되었으며, 해안에는 해일이 몰아쳐 수많은 시설과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전선.철도.가스.수도가 끊어지고 수십만 명이 죽거나 다쳐서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세계의 문화 대도시를 자랑하던 일본 수도 도쿄도 가옥의 2/3가 무너지거나 화재로 불타 18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했으며,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공포에 질려서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지진으로 인해 일본 각지에서 조선인이 무려 6,661명이나 학살당하는 이른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유언비어 때문인데, "조선인이 우물마다 독약을 풀어 놓았다." "공산당 놈들이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킨다." 이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일본인들 사이에 급속히 퍼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상도 하지 못할 유언비어가 퍼졌을까요? 그것은 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 군부와 경찰이 꾸며낸 짓인 것입니다. 대지진의 참변을 당한 일본인들이 군국주의 일본 정부에 대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국민의 관심을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쏠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터무니없는 소문은 군부에서 즉각 조작되어 퍼져 나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를 꾀하고 있다.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들도 도쿄 시내에서 목격되었으니, 조선인을 엄밀히 단속하기 바란다.'

 

이것이 내무 대신과 경시청 총감의 지시에 의해 도쿄와 가나가와 현의 각 경찰서.경비대에 보내진 전문으로,

이 때문에 '조선인의 방화와 폭동'이라는 유언비어가 삽시간에 퍼진 것입니다.

 

 

지진 발생 이튿날인 2일 오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5일에는 계엄사령부가 "조선인을 적극 수사하여 방화와 폭동을 인정하게 하라." 라는 허위 자백 명령을 비밀리에 지시했으며, 일본 신문들도 유언비어를 사실인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조선인을 모조리 죽여라!" 각지에서 일본인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습니다.

 

일본인들은 스스로 '자경단'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조선인을 죽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살극을 저질렀습니다.

집과 가족을 잃고 당장 살 길이 아득한 일본 이재민들은 조선인을 사냥하는 악마로 변해 버렸습니다.

 

도쿄와 가나가와 현에서는 주로 일본 군대와 경찰이 학살극을 벌였고, 지바와 사이타마 현에서는 자경단이

조선인을 죽창, 일본도, 곤봉, 철봉으로 마구 죽였습니다. 특히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은 잔인하기 그지없었

습니다.

 

 

가장 흔하게 쓰인 학살 방법이 집단 학살인데요, 망나니 같은 자가 쇠갈고리를 흔들고 날뛰면, 일본인들은

체포한 조선인들을 향해 달려들어 죽창이나 일본도로 찌르는가 하면, 갖가지 흉기로 살해했습니다. 귀를 찢거나 눈을 후비는 등 공동 분담식의 살해 방법으로 최대한 고통을 당하게 하여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 피를 본 일본인들은 점점 더 잔인해져 갔습니다. 톱으로 썰어서 살해하는 극렬한 방법을 쓰는 자도 있고, 재미가 나서 낄낄거리며 장난삼아 살해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선인 여자 살해 과정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추악스러웠습니다.

 

 

그렇게 학살된 조선인은 일본 각지에서 모두 6,661명으로 <독립 신문> 특파원이 집계했는데, 이 신문은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했습니다.

 

학살된 조선인은 대부분 불에 태워져서 시체도 찾지 못했습니다. 일본 내각이 군대에게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체를 불에 태워 학살 증거를 없애려 하였습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일본 자경 단원 일부를 체포

하여 재판에 붙이는 척하다가 풀어 준 일입니다. 일본의 만행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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