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사육신과 생육신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켜

꼬두암 2015. 12. 5.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육신과 생육신은 어린 임금 단종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켰는데요, 사육신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이며, 생육신은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

성담수.남효은입니다.

 

단종이 즉위했을 때는 겨우 12세였는데, 숙부인 수양대군이 1453년 10월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를 찾아가

죽인뒤에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 반대파를 없애고 마침내 왕이 되었는데, 바로 세조입니다.

 

 

이 일에 반발하여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생육신은 세조가 단종

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것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단종에게 절개를 지켰는데, 특히 매월당 김시습

은 21세의 나이로 삼각산 절에서 공부하다가 세조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분하여 사흘 동안 문을 잠그고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김시습은 통곡하며 많은 책을 불살라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김시습은 어릴 때부터 천재로 불렸으며, 5세 때 세종이 상으로 비단을 주며 가져가라고 하자 긴 비단 뭉치

를 풀어 끝과 끝을 허리에 매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며, 벼슬은 일체 하지 않고 <금오신화>라는 최초의

한문 소설을 지었습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성삼문, 박팽년 등 몇몇 충신이 상왕인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려놓으려는 데서

은밀히 시작되었습니다.

 

1456년 6월 2일, 창덕궁 안에서 명나라 사신들의 환영 잔치를 벌일 예정이었는데, 이 날이 바로 의거일이

었습니다.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을 맡은 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세조 부자를 죽이고, 단종을

몰아 낸 자들을 모조리 살해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런 때 세조의 오른팔인 한명회는 예감이 이상하여 세조에게 귀뜸했습니다. "세자 저하는 참석을 피하게

하시고, 별운검도 세우지 않는 게 좋을 듯싶사옵니다." 이리하여 별운검이 취소되자 거사 계획을 미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겁이 난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그 날 밤에 세조를 찾아가 역모 사실을 고해 바쳤으며, 세조는

조사하여 역모 증거를 잡았습니다. 그러고는 성삼문을 체포하고 친히 죄를 다스리기 위해 국청을 설치했

습니다.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임금이라 부르지

않고 '나리'라고 부르며 죽음을 택하면서, 1456년 6월 8일 새남터의 형장으로 끌려가 처형을 당했고,

유성원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사육신'이라고 불렀으며, 벼슬

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김시습을 비롯한 6명의 충신을 '생육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