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황진이 서경덕 커플 정말 스승과 제자로 남았을까

꼬두암 2015. 11. 1.

조선 최고의 기생인 황진이는 학자 서경덕과 열애설로 유명한데, 황진이 서경덕 커플은 실제로 스승과

제자 사이었다고 합니다. 황진이는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 기록된 바 없으며, 단지 서경덕의

제자라는 것을 보아 조선 중기(1506?~1567?)의 인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진이고 기명(기생 이름)은 명월입니다. 황진이에

대해 민간에 퍼진 이야기는 많이 있으나, 내용이 여러가지여서 어느 게 믿을 수 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추측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과 예의 범절을 익혔으리나 짐작됩니다. 10세

때 이미 웬만한 책은 다 읽었으며 시와 서화, 가야금에 뛰어났습니다. 또 용모가 너무나 아름다워 동네

총각이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황진이는 그 총각이 가엾어서 시집도 가지 않고 기생이 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기생 황진이는 그 명성이 한성에까지 뻗쳐서 내로라 하는 선비들이 줄을 지어 찾았습니다. 아름다운

외모에 춤.노래.악기 연주는 물론이요, 시와 그림과 글씨에 두루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황진이는 못된 양반이나 학자들의 콧대를 꺽어 놓기로도 유명했습니다. 당대의 최고 학자인 서경덕을

유혹했으나 실패하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책을 읽고 연구하며 살은 대학자

서경덕(1489~1546)의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인데, 서화담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경덕은 조선의 성리학 발달에 큰 공을 세웠으며, 황진이 같은 미녀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은, 높은

인격을 지닌 학자로도 이름이 났습니다. 사실 황진이같은 미모의 기생이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수양이 깊은 학자였던 것이었죠.

 

 

황진이가 지은 시조인 '청산리 벽계수야'와 '동짓달 기나긴 밤을'같은 작품이 <해동가요>, <청구영언>

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 관 속에 넣어 묻지 말고 들에 놔 두어 개미와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도록 해 주세요."

 

황진이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 마흔 살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황진이의 시체를 개성

근처에 있는 장단에 고이 묻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장단 판교리에 황진이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황진이와 서경덕이 사랑하는 사이인지, 스승과 제자 사이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하겠

습니다. 둘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끈끈한 무언가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은 가지만, 역사에선

단지 스승과 제자 사이었다고 하니 그냥 믿을 수 밖에 없겠지요.   

 

 

마지막으로 시대를 앞서 간 여인 황진이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아름다웠던 황진이는 15세 때 이웃 청년이 자신을 짝사랑하다 상사병으로 죽자

충격을 받아 기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미모뿐만 아니라 시와 노래까지 뛰어나 조선 팔도에 그

이름을 떨쳤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소세양과 이사종 등의 풍류객들과 어울렸고, 재상의

아들 이달과 금강산을 유람하는 등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8수가량의 한글 시조와 <별김경원>, <영반월>, <송별소양곡> 등의 한시를 남겼고, 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를 '송도(개성) 삼절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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