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일제강점기 친일파 명단과 매국행위

꼬두암 2015. 10. 27.

일본에게 정치의 모든 권한을 빼앗긴 일제강점기 친일파 명단을 정리해 보면 을사 5적으로 불리는 대표적

매국노는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과, 그 밖에 자작의 작위를 받은 민영휘, 이병무, 민병석

이 있으며, 일진회 매국 단체의 송병준과 이용구를 들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정치의 모든 권한을 빼앗겨 있으나마나 했습니다. 그것도 이제 바람 앞의 등불처럼

멸망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그리고 이른바 차관 정치로

우리나라를 움켜진 일본은 한일 신협약, 군대 해산 등으로 이젠 다 된 음식을 입안에 넣기만 하면 되는 셈

이었습니다.

 

 

한일합방으로, 한반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고 조선 백성을 자신들의 국민이 되게 하는 작업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일진회 매국 단체 놈들이 합방 계략을 세운다면서?" "송병준과 이용구는 만고의 역적이지!"

 

1909년이 저물어 갈 무렵, 대한제국에 위기가 닥치고 있었습니다. 합방에 대한 소문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를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습니다.

 

12월 22일, 오전에 명동 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이 거행되었는데, 여기에 이완용

등 대신들이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날 두 명의 조선 젊은이가 성당 부근에 나타났습니다. 이재명과

이동수였습니다.

 

 

평양 출신인 이재명은 소년 시절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1907년 대한노동이민회 모집으로 미국으로 건너

가 노동을 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거기에서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귀국했던 것입니다.

 

애국자인 이재명, 이동수, 김병록은 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할 계획이었고, 애국자 김점익과 조찬연은

매국노 이용구를 암살할 계획었습니다. 이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추도식이 끝나고 이완용이 성당에서 나와 인력거에 탔습니다. 순간, 칼을 든 19세의 이재명이 덮쳤지만,

이완용은 어깨.등.허리 세 곳만 부상을 입었을 뿐 죽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애국자 이재명은 체포되어

사형을 받았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송병준은 도쿄에서 가쓰라 총리 대신에게 '자금만 준다면 한국을 일본 영토로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하여 합방론을 꺼냈으며 1억원을 요구했습니다.

 

일본 앞잡이 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 또한 합방을 도운 1급 매국노였습니다. 매국노 이용구는 일진회

이름으로 합방 성명서를 냈고 국민은 분노에 떨었습니다.

 

"하하, 조선 스스로가 우리 일본에 달라붙었구나!" 일본 총리 가쓰라는 어깨를 으쓱 했습니다.

 

가쓰라는 1910년 5월, 소네 통감을 불러들이고 데라우치를 3대 통감으로 임명했습니다. 치밀한 준비를

데라우치는 7월 23일에야 한성으로 부임해 와서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기회만 노렸습니다. 8월 16일,

이완용과 밀담에서 비로서 데라우치는 합방 문제를 꺼냈습니다.

 

마지막 어전 회의가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홍복헌에서 열렸는데, 이자리에서 이완용

은 '한국과 일본이 합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1주일 뒤 8월 29일 오후, 이완용이 도장을 찍은 한일합방 조약문을 통감 관저에서 발표하면서

조선 왕조는 태조 이성계 이후 519년 만에 순종 임금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말았는데, 모두 27왕이었

니다.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기까지 우리 민족은 일제의 압박과 수탈 속에서 신음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1919년 정월, 고종 황제가 68세로 세상을 떠나자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우리 민족은 압박과 설움 속에서도 일제에 항거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파 명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친일파들은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토지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대표적 매국노는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입니다. 

 

학부대신 이완용은 후작의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으며, 내부대신 이지용은 백작의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을 지냈으며, 군부대신 이근택과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자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을 역임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민영휘, 이병무, 민병석 등이 친일의 대가로 자작의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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