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독립협회 활동 그리고 해산

꼬두암 2015. 10. 31.

1896년 7월 2일 만들어져 1898년 12월에 강제 해산당한 독립협회 활동은 민영환, 윤치호, 서재필, 이상재

등과 프랑스 영사 플랑시,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이 이끌고 지식인은 물론 농민과 상인,

노동자 등이 참여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

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개화파뿐 아니라 일반 민중들 사이에도 퍼지기 시작했고, 1896년 7월 2일 독립

협회라는 시민단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독립협회의 1차적인 목적은 칭제 건원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왕을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독립 국가의 틀을 갖추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독립협회는 일반 민중들에게 독립 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독립신문>을 펴내고, 독립문, 독립 공원,

독립관 등을 세우기 위해 모금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금 운동 결과 백성들의 자주 독립 의식이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며 국민 자유권, 국민

평등권, 국민 참정권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헌법에 의해 민주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 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습니다.

 

아울러 1898년 3월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지식인, 학생, 상인, 주부, 승려 등 시민 1만여 명이 모이는

새로운 정치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치단체로 발전하는 것을 경계한 수구

세력과 러시아, 일본 등 외부 세력에 의해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 해산이라는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상식을 더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관파천이란 1895년 을미사변(명성 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이에

일제와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을

말합니다.

 

 

고종은 친일 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5대신을 체포하여 처형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김병시를 새로운 내각 총리대신에 임영하는 등 내각 인사를 단행하였고,

8월 22일에는 중전 민씨를 폐한다고 명한 조칙 등을 취소합니다.

 

그후 아관파천에 대한 지적이 일자 경복궁을 떠난지 1년여 만인 1897년 2월 25일에 경운궁(지금의 덕수

궁)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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