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천주교 4대박해

꼬두암 2023. 6. 14.

우리나라의 경우 천주교 박해로 인해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정착하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는데요, 천주교 박해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천주교 4대박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천주교 4대박해>

1. 신유박해(1801년)

1801년 1월 10일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붙잡아 처형시켰습니다. 그해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를 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되었습니다. 신유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되었습니다. 주 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하다가 자신의 도피로 인해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서 4월에 순교했습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되어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되었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습니다. 또 황사영은 체포되어 10월에 참수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는 300여 명인데요,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가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희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 기해박해(1839년)

1839년 3월~10월 동안 계속된 박해인데요, 프랑스 신부 모방, 샤스탕, 앵베르를 비롯해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 등 70여 명의 신자가 처형되었습니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時)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僻)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인 갈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병오박해(1846년)

병오박해는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 체포를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입니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 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은 장사(杖死)로 순교했습니다.

 

 

4. 병인박해(1866년)

1866년 초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 계속된 박해입니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었고,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 수만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대략 1만명 내외로 추산됩니다.

 

 

<우리나라 천주교 전파 과정>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광해군 때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이수광과 유몽인 등이 당시 중국 베이징(북경)에 머물던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에게 '천주실의(1603~1067 간행)'라는 책을 받아오면서 비롯되었습니다. 

 

 

그후 1645년(인조 23년)에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있던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독일인 아담샬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얻어 왔으며, 숙종 때는 청나라 사신으로 갔던 이이명이 독일인 신부 쾨글러 등에게 천주교 서적을 많이 얻어 왔습니다. 

 

그 시절에 서인들에게 정권을 뺏기고 현실 정치에 불만이 많던 남인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에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했는데요, 이익과 안정복 등은 천주교를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이라고 하여 '서학(西學)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모든 사람은 귀천이 없고 평등하다'는 평등사상과 '하느님을 믿으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에 이끌려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특히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양반과 중인 그리고 사회에서 멸시당했던 천민과 상민 등이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18세기 중엽, 천주교는 조선 사회에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조선 사람으로서 최초로 청나라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이벽과 함께 1784년에 천주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이미 깊이 뿌리내린 유교 사상과 교리적으로 부딪치는 천주교의 신자가 증가하자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성리학만 절대적 가치로 여기던 조선 사회의 풍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천주교가 내세운 평등 사상을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주교는 우리나라에서 박해를 받아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를 받게 되고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천주교는 양반층에서도 신자가 생기고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해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들여와서 적극적으로 전파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상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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